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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생활] 건기의 시작과 매니 파퀴아오 마스크

by 필인러브 2020.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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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요?"

"그럼! 근데 이 마스크가 누구 얼굴인 줄 알아?"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과 굶주림 중 어느 것이 더 무서운지 생각하다가 생존을 위한 쇼핑에 나섰다. S&R 슈퍼마켓은 11시에 문을 연다고 했지만, 좀 더 한적하게 쇼핑을 하고 싶어 한 시간이나 일찍 갔는데,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띄엄띄엄 놓아둔 의자에 앉아 쇼핑몰이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다가 아저씨 한 분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 아저씨, 쓰고 있는 마스크가 상당히 재밌다. 웃는 얼굴을 실사 프린트한 마스크인데, 아저씨 얼굴형이나 눈매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마치 아저씨 얼굴 그 자체 같다. 잠깐 망설이다가 아저씨 쪽으로 가서 - 하지만 1미터 거리를 유지한 채 - 사진을 좀 찍어도 되느냐고 여쭈었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아저씨는 멋지게 손가락 브이까지 해주신 뒤 내게 마스크에 그려진 얼굴이 누구 얼굴인지 아느냐고 물어오셨다. 정답을 알고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것을 내가 알 리가 없다. 아저씨는 사뭇 즐거운 목소리로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의 얼굴이라고 알려주시면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셨다. 아저씨의 눈가에, 그리고 마스크에 온통 웃음이 넘실대었다. 


슈퍼마켓은 쾌적하였지만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쇼핑을 마치고 싶어서 평소처럼 물건을 꼼꼼히 보는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더니 장보기가 30분 만에 끝났다. 그런데도 집에 오자마자 내가 느낀 것은 엄청난 피로감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쓴 탓이었다. 고작 30여 분 쇼핑을 했을 뿐인데, 투투반까지 자전거를 타고 온 것처럼 피곤하다고 생각하면서 슬그머니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 열은 하나도 나지 않았지만, 오후 내내 몇 번이나 열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혹 코로나19에 감염이 되더라도 집에서 혼자 있으리라는 다짐을 새삼스럽게 해보았다. 내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일을 하는 일을 한다면 나 스스로 나를 용서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리고 스스로 용서하지 못할 일을 하면서 사는 것처럼 따분한 삶도 없다.


보통 때와는 다르게 매우 조용한 금요일 밤, 필리핀 기상청(PAGASA)에서 건기(dry season)가 시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흔히 말하는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4월에 가까워지면서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것이야 매년 있는 일이지만, 올해만큼 여름이 반갑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 싶다. 코로나19 때문에 바깥 외출이 금지된 상태에서, 5월 마지막 주부터 6월까지 불볕더위가 지속할 예정이라는 뉴스는 무섭기까지 하다. 요즘 루손섬은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지역사회 봉쇄‧격리조치(enhanced community quarantine) 기간이라서 식료품이나 의약품 구매를 위한 외출이나 해외 출국을 위한 공항으로의 이동 때 외에는 바깥 외출이 금지된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4월 12일까지 격리기간이라고 했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기간이 늘어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5월은 가장 더운 달이 된다. 5월 더위가 끝나면 태풍이 오다가 10월 말 정도가 되면 서서히 기온이 좀 내려간다는 식이다. 만약 5월을 지나 6월까지 격리기간이 연장되면, 선풍기도 변변히 없이 지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당장 먹을 식량조차 변변히 준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도 오지 않고, 기온마저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코로나19 때문에 하루 100페소 밥벌이도 하지 못하고 굶어 죽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복잡해져 왔다.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S&R Membership Shopping



▲ S&R 쇼핑몰이 문을 열기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사회적 거리두기 



▲ S&R 쇼핑몰은 멤버십 쇼핑몰이라서 다른 슈퍼마켓보다 확실히 한가하다. 



▲ 쌀과 우유가 많아서 나를 안심하게 했다. 휴지도 잔뜩이다. 만약 빈 매대를 보았으면 마음이 차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 지역사회 격리로 한가해진 마카티의 거리 



▲ 이 거리를 수백 번은 왔었지만, 이런 조용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스 때문에, 필리핀 최고의 비즈니스 중심지가 이렇게 조용해졌다. 





▲ 피불고스 한인타운 



아임호텔 사거리 




[필리핀 마닐라 생활] 건기의 시작과 매니 파퀴아오 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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