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생활155 [마닐라 산책] 들꽃 같은 산타아나 성당(Santa Ana Church) 날씨는 더운 데다가 골목이 좁고, 치안도 애매하여서 마닐라의 거리를 걷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천천히 걸을 때만 얻는 즐거움이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평범한 좁은 골목길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흡사 키 작은 들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차를 타고 다닐 때와는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좀 더 가까이 보게 된다. 대체로 별다른 목적지도 없이 기꺼이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지만, 가끔은 어딘가 목적지를 정하고 걷기도 한다. 오늘 내 목적지는 타귁시티에 있는 산타아나 성당. 타귁시청 너머 타귁강 강가에 있는 오래된 가톨릭교회이다. 이 성당은 마이너 바실리카 어쩌고 하는 소성전과 세인트 앤 대교구 성지(Minor Basilica & Archdioce.. 2024. 2. 20. [필리핀 마닐라 생활] 현재 대기자 70명, 메랄코에서 대기번호표를 받는 일이란 필리핀 마닐라에서 생활하면서 보기 드물게 흡족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을 만났다. 왜 저렇게(혹은 왜 저 따위로) 업무를 처리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일을 참 잘한다고 감탄하는 일은 1년에 1~2번 있으면 많은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메랄코 전기요금 계약자 명의변경을 하고 싶어서 메랄코 타귁 비즈니스 센터 사무실에 갔다가 대기 번호표만 받고 깜짝 놀라서 도망치듯 나오고 말았다. 내 앞에 39명의 고객이 기다리고 있어서 대략 65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친절한 가드 아저씨 덕분에 다행히 의자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1시간을 앉아 있기에는 굉장히 불편한 플라스틱 의자이다. 전날 새로 로드 충전을 해서 스마트 데이터도 가득한데 어째서인지 인.. 2024. 2. 18. [마닐라 생활] 필포스트 우체국에서 필리핀 LTO의 운전면허증 수령하기 "그렇다면 언제 제가 플라스틱으로 된 운전면허증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나중에 발급되면 우체국을 통해 보낼 터이니 기다려요!" 필리핀 교통국(LTO) 직원은 종이로 된 운전면허증을 내게 주면서 필포스트(PHLPost) 우체국을 통해 운전면허증이 전달될 것이라고 알려왔다. 운전면허증을 만들기 위한 플라스틱 카드의 공급부족으로 당장은 발급이 안 되지만, 나중에 플라스틱이 생기면 만들어서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뭐 그런 이야기이다. 이미 신문에서 관련 기사를 읽었던 터라 무슨 이야기인지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이럴 때는 운전면허증의 흐릿한 흑백 복사본 종이가 훼손되지 않도록 비닐 폴더에 넣어 잘 보관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콘도 관리비나 수도세, 전기요금 모두 온라인 납부가 가능한 세상에 살.. 2024. 2. 16. [마닐라 생활] 이발사 지미가 생각하는 타갈로그어 꼰띠랑(Konti lang)의 의미 그와 나는 꼰띠랑(konti lang)라는 말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절한 목소리로 "꼰띠랑(조금만)"을 세 번이나 외치고 자리에 앉았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손에서 내 왼쪽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 나갔다. 인생의 많은 것들이 그렇지만, 머리카락도 한번 짧아지면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일에는 화를 내기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찾으려 하는 편이었다. 나는 그와 내가 '조금'이란 단어에 대하여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통감하면서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오른쪽도 뭉텅 잘려 나가길 기다렸다. 오늘 내가 만난 이발사 아저씨의 이름은 지미였다. 바리깡이며 가위 등의 장비는 투박하지만 이발기를 다루는 손놀림이 좋은 것이 꽤 오래 이발사.. 2024. 2. 16. [마닐라 산책] 어느날 또다시 붉게 타오르리라 바랑가이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좁은 골목길은 물론 넓은 대로변까지 온통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북적이던 소음으로 가득하던 거리가 이렇게 조용해지니, 평소와 다른 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골목길을 하얗게 보이게 만들 정도로 뜨거운 날씨 때문인지 그 흔한 고양이마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조용해진 거리를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앞에 걸어가는 남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남자의 생김새는 매우 평범했지만,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것은 남자가 입고 있던 붉은색 티셔츠 때문이다. 티셔츠 뒤에 한글로 '결의문 나, 2010년 어느날 또다시 붉게 타오르리라'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티셔츠 왼쪽 아래로는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도장 모양이 선명하다.. 2023. 11. 7. [마닐라 생활] 타이어 펑크 때우기와 직업의 귀천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고 하지만, 제 일을 하찮게 하는 사람은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다. 누구나 탐낼 만한 일을 하면서도 대충 일하는 사람도 종종 만난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는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이니, 무엇이 직업의 귀천을 구분하는지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하나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업무 능력이나 장인정신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불성실한 태도로 함께 일하는 이를 힘들게 할 필요는 없을 터인데 싶지만 잔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냥 대충 하면 되지요'라는 마음가짐은 누군가의 지적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일까, 험한 일이라도 자기 일을 .. 2023. 11. 4. [마닐라 생활] 그랩카와 라디오 드라마 필리핀 라디오 드라마 소리 차에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붙였던 스티커가 가득했다. 누군가 떼어내려고 시도했지만 잘되지 않았는지 모퉁이만 잔뜩 찢어져 있다. 하지만 차가 낡아 보이는 것이 지저분한 스티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된 차였다. 2012년 스티커가 있는 것을 봐서 최소 10년은 탔을 차는 움직일 때마다 '그르렁' 혹은 '덜덜'과 같은 내지 멀아야 하는 소리를 냈다. 쿠션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푹 가라앉은 의자는 차가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를 함께 움직여 댔고, 의자가 움직일 때마다 언제 던져놓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먼지가 뒤엉킨 온갖 잡동사니가 함께 흔들렸다. 이상하게 차가 잡히지 않는 날이었다. 약속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그랩은 물론이고 오토바.. 2023. 11. 3. [마닐라 생활] 10시간 근무에 일당 2천 페소? 한-필리핀 XR 기업교류회 운영요원 세상에는 대체 어떻게 생활하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급여를 주겠다는 직원 채용 공고가 많기도 하다. 필리핀도 예외는 아니라 "당신이라면 이런 대우를 받고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은 신입직원 채용 공고를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다. 타인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다고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좀 황당한 공고가 등장했다. 필리핀 물가나 현실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하고 싶은지 그 사연은 알 수는 없지만, 그 연유가 어찌 되었든 황당한 것은 사실이다. 시위할 때도 젊잖게 'I am a little upset'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는 캐나다인처럼 말하자면, 이런 식의 깎아내리기는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나를 황당하게 만든 구인 공고는 창조문화산.. 2023. 9. 21. [필리핀 마닐라] 망고는 가격이 얼마인가요? 인간관계의 폭이 매우 좁은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은 갑자기 한국에서 온 또래를 만나면 내심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비슷한 나이라고는 하지만 관심사가 전혀 다르고, 생활도 다른 탓에 대체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지속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 짧은 만남이 즐거운 것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볼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을 놓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이이란 말인가. 지난 겨울 방학 때 잠깐 필리핀 마닐라로 어학연수를 왔었던 분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마닐라의 과일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는 것이었다. 필리핀에 살면 망고와 같은 열대 과일을 실컷 먹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하소연을 듣고 생각해보니 필리핀 생활을 하면서 열대 과일을 먹는 .. 2023. 3. 24. 이전 1 2 3 4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