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집이 어딘데?"
"저기 멀리 녹색하고 노란색으로 된 집 보여? 바로 그 집이야!"
"응? 여기 집이 모두 녹색하고 노란색인데?"
일찍이 셰익스피어가 그의 희곡을 통해 말하길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뜻에서 2022년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상당히 좋은 한 해를 보낸 듯하다. 12월의 마지막 날을 바타드(Batad)에서 보낼 수 있다니 얼마나 운이 좋다는 말인가. 2022년의 마지막 날이 끝나가고 있다는 서운함보다 몇 년 만에 로나 할머니를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할머니 댁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로 방문하지 못한 몇 년 사이 바타드 빌리지에도 변화가 생겨 제법 길이 좋아졌지만, 길 상태가 좀 좋아진 것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몹시 추운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로 내려가다가 지나가던 외국인 아저씨가 미친 사람을 보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저씨를 탓할 수 없는 것이 누가 봐도 과한 옷이었다. 아무리 바나웨가 서늘한 지역이라고 하지만 햇살 쨍한 날에 내피까지 따로 달린 두꺼운 겨울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마을 아래까지 내려가는 길은 좁은 계단식 논이니, 이내 온몸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시골 살림에는 도움이 될 것 같아 이것저것 넣어 욕심을 부렸더니 가방에는 이미 짐이 한가득하였다. 옷을 할머니에게 주고 싶으면 입고 산을 내려가는 것 외에는 별 방법이 없다. 필리핀에서 겨울옷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바타드는 새벽이면 기온이 쑥 내려가서 조금이라도 따뜻하라고 부엌 화로를 방 한쪽에 두는 산골 마을이다. 어떻게든 가지고만 가면 할머니께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바타드 빌리지에 수없이 방문했었지만 올 때마다 라이스 테라스 중간쯤에 와서야 물 한 병 챙겨 넣는 것을 잊었음을 깨닫는다. 스타벅스에서 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먹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열 번도 넘게 하면서 논두렁 사이를 힘겹게 걷다가, 속이 답답하고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야 녹색과 노란색으로 된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할머니를 만난 것과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기뻤는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두꺼운 외투를 벗고 짐을 내려놓는 일은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것만큼 즐거웠다. 그리고 다행히 할머니께서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만났으니 내 얼굴이야 가물가물 기억이 잘 나지 않으셔도 립스틱을 주고 간 한국인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박에 얼굴에 미소가 가득 퍼지며 "어머나!"를 외치신다. 2017년에 처음 할머니 댁에 왔을 때 할머니께서 두통이 심하다고 하시기에 립스틱을 발라 드리며 미모로 두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알려드리고 그 뒤 올 때마다 만병통치약이라는 농담과 함께 화장품을 선물했더니 그걸 잊지 않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선물하였던 운동화를 신을 때마다 가끔 내 생각을 하셨지만 한참이나 오지 않기에 당신을 잊은 줄 알았다고 하시기에 절대 할머니를 잊은 것은 아니고 그저 코로나19 때문에 여행을 오지 못한 것이라 말씀드렸더니 이내 눈물을 보이신다. 그동안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연말이지만 딸네 가족도 오지 않아서 혼자 계셨는데 뜻하지 않은 방문객이 마냥 반가우신 모양이다. 호들갑스러운 인사를 끝내고 할머니와 나란히 마당에 앉아 가지고 간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붉은 립스틱이 로나 할머니 얼굴에 채워졌고, 모처럼의 두통약 배달에 할머니 얼굴 가득 웃음꽃이 만개했다. 비콜 쪽으로 여행을 떠나려다가 로나 할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루손섬 북쪽으로 여행 일정을 잡았는데, 모처럼 좋은 결정을 한 모양이다.
[필리핀 바나웨 여행] 바타드 라이스 테라스의 로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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