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꼴등을 도맡아 하던 아이가 부모가 되어 자식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데 내가 딱 그런 식이다. 그동안 여행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은가에 대한 글을 상당히 많이 썼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준비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준비성은 평균 이하이다. 어딜 가면서 뭔가 조사하거나, 확인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당장 내키는 기분대로 즉흥적으로 움직이면서 대체 몇 시에 문을 여는지조차 확인하기를 귀찮아한다. 언젠가 한 번은 배가 출발하는 시간표도 보지 않고 항구에 갔다가 그다음 날에야 배에 탄 적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실수나 고생이 내게 큰 교훈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수를 저질러 놓고도 덕분에 색다른 것을 보게 되어서 즐거웠다고 생각하니 습관이 고쳐질 리가 없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 모두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짜증을 내는 성격은 아니라서 다행이지, 좀 치밀한 동행자가 있었더라면 단단히 욕을 먹었을 터이다.
매달 피나투보 화산에 가면서 불라칸이니 클락 등에 들리는 것에는 기름값이 좀 아깝다는 핑계가 있다. EDSA의 교통체증을 뚫고 고속도로 위에 오르면 바로 산타 줄리아나 마을로 가는 일이 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왕 나왔으니 뭔가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덕분에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요즘에 와서는 새롭게 가볼 만한 곳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 까닭에 클락에 있다는 클락 박물관과 4D상영관(Clark Museum and 4D Theater)에 가서 4D로 상영해준다는 다큐멘터리나 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클락에 도착할 수는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EDSA에 차가 무척이나 막혔다. 차가 어찌나 막히는지 필리핀 사람들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염려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이다. 물론 누군가가 나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차가 줄었기를 기대했는데 평소와 다름이 없다. 그래서 그럭저럭 클락에 도착했을 때는 3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박물관 입구에 있던 직원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조금 전에 4D 상영이 시작되어서 지금은 볼 수 없다는 비보를 전했다. 전시실만은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입장료로 200페소나 주고 작디작은 박물관만 보고 나오려니 돈이 무척이나 아깝다. 200페소면 빵을 40개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다음 달로 관람 기회를 미루게 했다. 4D 상영 시간이 언제인지만 잠깐 확인했더라도 헛걸음은 하지 않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박물관 주변 공원을 잠깐 산책하고 오래간만에 깨끗한 동네를 산책하는 일도 참으로 즐겁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쭉 뻗은 넓은 도로와 시원한 초록의 잔디가 깔린 마당, 넓게 만들어진 현관까지.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가진 집들을 보면서 왜 사람들이 클락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하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클락에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싼 임대료가 무섭기도 하지만, 클락 특유의 쾌적함은 내게 있어 너무나도 심심하게 여겨질 것이 뻔했다. 나로서는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를 가진 클락보다는 사소한 일에도 방글방글 웃어주는 필리핀 사람이 많은 마닐라 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나는 그 옛날에도 미군들은 집을 참 잘 지었다고 감탄하는 일 따위는 그만두고, 박물관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고 슈퍼에 장을 보러 가겠다는 매우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 필리핀 마닐라. EDSA.
▲ 필리핀 클락. 클락 박물관과 4D상영관(Clark Museum and 4D Theater).
▲ 주차장이 매우 넓다.
▲ 내부 구경을 하지 못했기에 건물 사진을 잔뜩 찍었다.
▲ 다음에 방문할 때는 4D상영관의 상영시간을 꼭 확인하기로 했다. 지켜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런건 닥쳐봐야 알게 된다.
▲ 박물관 앞에 있는 공원, 이 공원의 이름은 클락 퍼레이드 그라운드(Clark Parade Grounds)이다.
▲ 하지 말라는 것이 꽤 많은데, 자전거도 타지 못하게 한다.
▲ 반 하우스(barn houses). 헛간은 아니고, 1904년에 미군에서 지었다는 집이다. 당시 17채의 주택을 지었다고 하는데,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군 사령관들이 살았다고 한다. 한때는 식당과 항공사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역사유적지로 만들기 위해 작년인가부터 개인에게는 임대하지 않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탁아소와 클락 지역 홍보 사무소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 탁아소(CDC Child Learning Center)
▲ The Foreign Merchant's Club
[필리핀 클락] 클락 박물관과 1904년에 미군 사령관이 살던 집(barn ho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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