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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루손섬

[필리핀 바탕가스 여행] 빈토르와 여섯 마리의 새끼돼지

by 필인러브 2020.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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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있었지만, 물이라고는 한줄기도 보기 힘든 척박한 야산이었다. 3월의 뜨거운 바람이 산자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직 점심때도 되지 않았건만, 더위조차 나무 그늘로 숨어들고 있었다. 되도록 그늘로 걸었지만 이내 온몸에 땀이 흘렀다. 그래도 예전보다 길이 좀 더 길답게 되어 있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의 발자국이 만든 길은 좁아도 단단했다. 게다가 산꼭대기에 사는 누군가 이 산자락 틈으로 수도관을 연결해 놓고 있었다. 값싼 재질의 푸른색 수도관이 내게 훌륭한 길 안내자가 되었다. 몇 번이나 발걸음한 산길이라 해도 내 기억력이란 신통하지 못했다. 갈림길에서 잠깐 방향을 잃었지만, 수도관을 따라가면 되었다. 길을 안다고 해도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걷기는 확실히 더운 날이었다. 발가락에 땀과 엉겨 붙는 흙의 감촉이 싫어서 그만 산에서 내려갈까 싶었지만, 반 정도 올라온 것이 아까워서 계속 올라가 보기로 했다. 가쁜 숨을 내쉬다가 문득 눈에 익은 담장을 발견했다. 도시의 기준으로는 그저 풀더미에 불과하지만, 산속의 기준으로는 담장이 확실했다. 허술한 경계선이지만 띠따네 움막이 틀림없었다. 멍멍. 세 마리나 되는 개들이 세찬 소리로 짖으면서 나를 맞이해주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대고 있는데, 빈토르의 얼굴이 보였다. 


빈토르를 처음 만났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정도 전의 일이었다. 5년 전의 그는 누에바 비즈카야(Nueva Vizcaya) 산타페의 깊은 산자락에 있는 고급 요양원에 갇혀 있었다. 말이 요양원이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 확인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감옥 비슷한 곳이었다. 요양원 안은 촘촘한 창살이 가득했고, 넓은 마당에는 사람 하나 나와 있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부터 웅웅 짐승 비슷한 울부짖음이 간혹 들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빈토르가 산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산에 불을 질렀다고 해서 모두 정신병원에 갇히는 것은 아니지만, 빈토르가 책을 보고 폭탄을 만들어 산에 던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불을 질렀는지 물었지만 빈토르는 명확한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폭탄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걸 왜 산에 던졌는지는 끝내 풀리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고,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렸다. 오랜 감금 생활은 동네에서 똑똑하기로 소문났던 10대 소년을 사라지게 했다. 젊은 시절을 모두 병원에서 보내버린 그는 사람들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폭행이 있었는지 낯선 이가 다가오면 몸을 움츠리며 겁에 질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빈토르도 띠따에게는 소중한 동생일 뿐이었다. 띠따는 빈토르의 모습을 보고 꺼이꺼이 눈물을 멈추지 못했는데, 그 눈물은 빈토르의 상처를 보고 더욱더 깊어갔다. 해가 뉘엿 지고 있는데 아직 점심밥도 먹지 않았다는 말에 띠따는 눈물 바람을 멈추고 병원 직원들의 잔인한 처사에 화를 잔뜩 낸 뒤 동생을 산속의 병원에서 꺼내 바탕가스의 바다로 데려갔다. 다행히 바탕가스의 바다는 수십 개의 알약보다 좋은 치료제가 되어주었다. 치아에 물들어 있던 붉은 잎담배의 흔적이 사라질 무렵이 되면서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간혹 자리 잡기도 했다. 


작년에 누에바 비즈카야 여행을 가면서 그가 있었던 정신병원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움직임을 잊은 듯 산길은 어느 것 하나도 변해있지 않았고, 병원의 철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을 보면서 나는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말이 좀 어눌하기는 하지만, 요즘의 그는 누가 봐도 정상인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특유의 낯가림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빈토르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움막 바깥으로 나와서 방문객을 확인했다.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개가 자꾸 짖으니 나와본 것이다. 다행히 빈토르는 나를 바로 알아보고는 너라면 산에 올라와도 괜찮다는 그런 몸짓을 해준다. 빈토르는 산에서 돼지와 염소를 키우고 있었다. 한 달 전에 키우던 돼지가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아서 요즘 매일 오전마다 올라와 밥을 주고 간다는 것이다. 빈토르는  돼지와 염소 중 어느 것이 더 비싸냐는 질문에는 재빨리 염소라고 알려주었지만, 어느 것이 더 사랑스럽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새끼 돼지가 가장 귀엽다고 결론을 알려준다. 한참을 생각할 것도 없이, 새끼돼지는 정말 귀여웠다. 똥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 냄새가 좋지 못했지만, 촉촉해 보이는 연한 분홍색 코는 여간 사랑스럽지 않다. 똥 때문에 마구 껴안지는 못하고, 최대한 똥이 없는 부분을 골라 머리를 쓰다듬어 보는데 생각보다 손바닥 감촉이 좋다. 부드럽지도, 혹은 까칠하지도 않은 그 감촉. 더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돼지가 밥 먹는 것을 구경하다가, 파파야 나뭇잎을 잘라 염소 밥을 주고 빈토르와 산에서 내려갔다. 혼자 올라갈 때는 그렇게나 길게 느껴지더니, 빈토르와 둘이 내려가는 길은 퍽 짧게 느껴졌다. 




▲ 바탕가스 바닷가에 갔으니, 등산을 해봅니다.  



멍멍!! 



▲ 돼지네 집




▲ 이렇게 키우는 돼지를 귀엽다고 마구 만지면, 비누칠을 두 번이나 해도 손에서 아기 돼지 냄새가 사라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 돼지를 거북이만큼 좋아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귀엽다. 




▲ 더운데 움막까지 왜 뛰어가나 했더니 양동이 가지고 와서 파파야를 따서 담아 갔다. 



▲ 염소도 새끼를 배고 있었다. 




[필리핀 바탕가스 여행] 빈토르와 여섯 마리의 새끼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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