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생활155 [필리핀 마닐라 여행] 산타 아나와 770번 바랑가이 재잘대는 바람이 골목 끝에서 끝까지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 덕분인지 오후의 햇살 덕분인지 골목 안을 장식해 둔 깃발이 꽤 아름다워 보이는 오후였다. 한 줌의 비닐로 만들었을 초라한 장식이지만, 하염없이 펄럭이며 제할 도리를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일까 내 도리를 찾지 못한 나는 그 풍경이 좋아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이나 골목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그 풍경 속에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했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어릴 적부터 습관이지만,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면 꼭 그 동네 지도를 그려놓곤 했다. 하지만 내 동네 지도는 펜을 들고 종이에 그리는 지도가 아니다. 그저 내 마음속에 그리는 지도이다. 그러니까 어디에 가면 싱싱한 계.. 2019. 7. 23. [필리핀 마닐라 생활] 거북이 형과의 산책 한가한 오후, 나의 잘나신 친구분이 뭐 하고 지내느냐고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재빨리 "형 산책 시켜"라고 답장을 보냈지만, 그 뒤 소식이 없다. 평소 답장이 빠르고, 말도 많은 이 친구가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더니, 좋은 하루 보내라는 간단한 답만을 보내왔다. 거북이 산책시킨다고 하지 말고 그냥 거북이 운동을 시키고 있다고 답을 할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지겨워진 와중에 병원에서 스트레스성 알레르기 증상이 심한데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장을 그만둔 이후 실업자 신세가 된 내가 요즘 가장 즐겁게 하는 활동을 두 가지 꼽으라면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읽기와 "형"이라고 이름 붙인 나의 거북이를 산책시키는.. 2019. 7. 21. [필리핀 마닐라 여행] 불라칸 신공항과 페디캅, 우기 도로 침수 유난히 페디캅(Pedicab)이 많은 동네였다. 필리핀 시골로 가면 동네 골목이 좁고 기름값이 비싼 경우 트라이시클 없이 페디캅만 잔뜩인 동네를 만나게 되기도 하지만, 메트로 마닐라 도심에서 갓 벗어난 동네에 이렇게나 페디캅이 많으니 신기할 뿐이다. 게다가 이곳의 페디캅 자전거는 다른 지역과 모양이 조금 달랐다. 일단 차선 하나를 오롯이 차지해야 할 만큼 크기가 컸다. 그리고 운전기사 옆에 만든 승객용 자리는 두 명이 앉아도 부족함이 없게끔 넓어 보였다. 좌석 아래로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어 물건을 잔뜩 들고 타도 편할 듯 보였다. 자전거 앞쪽까지 튼튼하게 보이는 봉을 만들어서 비닐봉지며 우산 등을 걸 수 있게끔 해두었는데 주인 취향에 따라 백미러 거울이니 장식을 달아 놓아서 개성이 넘쳤.. 2019. 7. 4. [필리핀 마닐라 근교 여행] 소문과는 다르게 별 다섯 개. 아빌론 동물원(Avilon Zoo) 그렇다. 거북이 때문이었다. 나와 같은 유형의 인간에게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매우 사소한 것이 결정 요인이 된다. 꼼꼼하게 이런저런 것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머리에서는 알지만, 머리보다는 마음 쪽의 지분이 더 크다. 그래서 무언가를 결정하면서 현재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펴보고 결정해야 하는 일에서도 그런 사소함이 우선시 되니 아쉬운 일이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더 나은 해결책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심사숙고하였다고 획기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나는 현재의 만족감이 모여서 인생 전체의 만족감이 된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멀리.. 2019. 7. 3. [필리핀 마닐라 근교 여행] 로컬 스타일의 소풍 장소, 와와 댐(Wawa Dam) 세상을 이분법적 사고로 보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래도 여행객을 둘로 나눈다면 이동하는 과정을 즐기는 쪽과 이동하는 과정을 싫어하는 쪽으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전자에 속하는 인간이라서 여행 중 어딘가 새로운 장소로 가는 것 자체를 무척 좋아한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는 실망하는 일도 많지만, 어디론가 낯선 곳으로 가는 과정은 늘 흥미롭게만 여겨진다. 그래서 배를 며칠 타고, 버스를 열 시간 넘게 타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편이건만, 라 메사 워터쉐드(La Mesa Watershed)를 지나 마리키나 강을 따라서 형성된 로드리게스(Rodriguez) 마을은 좀 지루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재래시장이며 은행 등이 모여 있는 마을 중심가를 지난 지 제법 되었는데도 한적한.. 2019. 7. 2. [필리핀 생활] 마닐라에서 캐리어 에어컨을 수리받는 일이란 한국에서 살아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지만, 필리핀에서 고장 난 가전제품을 고치는 일은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 된다.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내 사용 방법의 문제인지 물건이 자주 고장 나는데, 고쳐 쓰려고 해도 쉽지 않다. 카메라 수리에 반년이 넘게 걸릴 정도이니, 제조회사와 고객 중 누가 더 느긋한지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긴,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다. 믹서기가 고장이 나서 필립스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더니 산타 크루즈(Santa Cruz)에 있는 수리점에 방문하면 고칠 수 있다고 알려주기에 두 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지난 달에 수리점이 폐업했다는 소리를 듣고 울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배낭 속에 든 믹서기의 묵직함을 느끼면서 필립스에 다시 전화해서 수리점 자리에 빨래방이 .. 2019. 7. 2. [필리핀 마닐라 여행] 카비테에 새로 공항이 생긴다니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산다고 해서 모든 가족이 친한 것이 아닌 것처럼, 미스터 브레인 씨는 내 머릿속에 있지만 친해지기 어려운 위치에 있어서 아직 나와 친하지 못하다. 손톱처럼 예쁘게 다듬어 주기도 힘들고, 입술처럼 붉게 색칠해 주기도 어려우니 평소에는 존재감마저 희미하다. 하지만 뇌란 놈이란 무심하기도 하여서 도무지 그런 것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예뻐하든 혹은 예뻐하지 않든 상관없이 제 할 일만 한다. 기분이나 수면 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의 신경전달물질이라는 도파민 역시 그렇다. 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듦에 따라 도파민의 분비량이 줄어든다고 하는데 이 도파민이 부족하면 새로운 것에 대한 흥분이 떨어진단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흐름을 좀 더 빠르게 느끼게 되는 것이라나. 보통은 1.. 2019. 6. 27. [필리핀 마닐라 여행] 낡은 라디오와 스탠 바이 미 며칠 전에 장을 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양배추 한 줌과 껍질 끝이 시들해진 레몬 두 개만을 품고 있는 냉장고의 모습이 꼭 내 머릿속처럼 무언가 꼭 있어야 할 것이 빠진 듯 비어 보였다. 머릿속을 채우는 일은 어려워도 냉장고를 채우는 일 정도야 쉽다. 시장에 가서 달걀이며 과일을 좀 사야겠다고 나섰는데, 자전거 앞바퀴 쪽 타이어의 바람이 홀쭉했다. 하지만 선크림은 없어도 자전거 펌프만큼은 가방에 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 주저 없이 자전거 펌프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어깨 근육을 써도 타이어에는 바람 한 조각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왜 이러는 것일까 싶어 타이어를 꼼꼼히 매만져 보니 압정이 박힌 것이.. 2019. 6. 25. [필리핀 마닐라] 인트라무로스 마닐라대성당(Manila Cathedral) 무료 오픈하우스 행사 (6월 12일) 필리핀 마닐라의 랜드마크라고 하면 마닐라 대성당(Manila Cathedral)을 빼놓기가 힘들다. 인트라무로스 입구에 있는 마닐라 대성당은 1581년에 지어진 이래 지금까지 필리핀 가톨릭 종교의 중심지로 필리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성당만큼 많이 파괴되고 여러 번 재건해야 했던 성당도 드물다. 스페인 시대에 마닐라 대성당이 처음 지어졌을 때 성당은 야자수와 대나무로 지은 소박한 건물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1583년에 성당에 불이 났고 야자수로 만든 성당 건물은 완전히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1952년에 석재로 다시 건물을 지어 올렸지만, 1600년도에 지진이 마닐라를 강타하는 일이 벌어졌다. 석재로 지은 건물도 지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 다시 성당을 지어야 했는데, 그 후에도 지.. 2018. 6. 8. 이전 1 ··· 13 14 15 16 17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