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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BDO은행에서 종이 통장을 만들려면

by 필인러브 2021.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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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들어가고 싶어서 이 풍경을 한 시간 가까이 보고 서 있으면 성격이 매우 나빠진다. 

 

어느 산뜻한 오후, 스티븐의 어머니는 스티븐의 방을 청소하다가 베개 밑이 불룩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베갯잇을 가득 차지한 것은 스티븐이 모아둔 돈이었다. 집에 일하는 메이드도 있고, 오가는 사람도 많은데 왜 돈을 은행에 저금하지 않고 베개 아래 숨기냐고 물었더니, 스티븐이 "은행을 어떻게 믿어요!"라고 외치더라나. 슬픈 것은 스티븐이 마크 아저씨의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마크 아저씨는 평생을 은행에서 일하시다가 은퇴하셨다. 

 

스티븐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온라인 뱅킹이니 모바일뱅킹과 같은 현대 문물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핸드폰 없이 해외에 살면서 본인임을 인증하지 못하여 곤란한 일을 몇 번 겪은 뒤로는 그놈의 인증서니 보안프로그램만 봐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대신 종이 통장을 좋아한다. 불필요한 비용 발생과 통장의 악의 도용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종이 통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시점에서 내 취향이 대세는 아니지만, 종이통장을 쓰는 것도 그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요즘은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오후 2시면 은행들이 문을 닫기는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천천히 은행에 가는 것이 내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BDO은행과 PNB은행 중 PNB은행에 더 자주 가는 것은 순전히 PNB은행에 종이 통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BDO은행 계좌는 ATM카드만 덜렁 있어서 입출금 내용을 보기가 불편하기도 했다. 

 

PNB은행처럼 BDO은행에도 종이로 된 통장을 하나 만들까 싶어서 은행에 갔다가 기분이 잔뜩 엉망이 되어 돌아와야 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은행 안에 5명밖에 입장할 수 없다고 하여 더위를 참고 한 시간 가까이 줄을 섰는데, 은행 안에 들어가서도 다시 또 한참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내 앞에 고작 3명밖에 줄을 서 있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한심스러운 업무 처리 속도이다. 그런데 나를 더욱 지치게 한 것은 그 와중에도 VIP로 보이는 고객 먼저 일처리를 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VIP는 5명 인원 제한에 열외가 된단 말인가. 그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많은 사람이 최고라고 이해를 했지만,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창구 직원이 전화를 한참이나 받는 것을 보는 일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전화가 걸려왔으니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한다면 뭐 어쩔 수 없겠지만, 내게 양해의 말 한마디 없이 옆 창구 직원이 부탁한 다른 일부터 처리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가장 허탈한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 참을성 있게 기다린 뒤에 통장 개설이 되지 않는다고 안내를 받은 일이었다. 패스북을 줄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통장에 입금하려는 돈에 대한 출처가 증명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 씨티은행에 저금해 둔 원화를 페소로 인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그 돈을 BDO은행에 입금해 놓고 쓰려고 한다고 설명을 해보았지만 한국 씨티은행에 저금된 돈이 어떻게 생긴 돈인지와 그 돈을 필리핀 씨티은행에서 페소로 인출했음을 증명할 서류를 가지고 와야 한다나. 나로서는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서류들을 발급받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신분증도 두 개나 챙기고, 초기 예치금까지 넉넉히 들고 갔음에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여 살짝 짜증이 났지만, 필리핀에 오래 살면 포기도 빨라진다. 하여서, 통장 개설이 불가능하다면 기존에 가지고 있는 계좌에 대해 온라인 뱅킹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더니 메모지에 BDO은행 웹사이트 주소를 적어주면서 접속해보라고 안내해준다. 신청서 하나 쓰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너무 지쳐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은행 직원과 5분 남짓 이야기하기 위해 한 시간 넘게 기다린 것에 완전히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은행 웹사이트에 접속했다가 기분이 정말 언짢아지고 말았다. BDO은행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내가 이미 온라인 뱅킹 신청이 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5년 전만 해도 내게 BDO은행 계좌를 만들어준 직원과 꽤 친했기에 뚜렷이 기억하지만, 온라인 뱅킹을 신청한 적이 없다. 당시 은행 직원이 내게 온라인 뱅킹을 신청하면 편하다고 안내를 해주기는 했지만,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기억까지 분명히 떠오르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온라인 뱅킹이 신청되어 있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다. 갑자기 예전에 일로일로 어학원에서 지낼 때 집안 청소를 하던 레오가 집에 생활비를 주어야 한다고 오토바이를 한 시간 넘게 타고 고향에 다녀왔던 생각이 났다. 레오에게 왜 은행을 이용하지 않느냐고 의아해했었는데 갑자기 그때 상황이 이해가 된 것이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은행에 들어가려면 이 종이에 체온을 적어야 한다. 다른 은행과 비교하여 비교적 문항이 적은 편이다. 
BDO은행 직원은 미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감탄스러운 업무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내 문의에 대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꼭 안쪽 사무실 누군가에게 재확인하고 와서 안내해주는 것을 봐서 불친절하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하루가 48시간은 된다는 듯한 태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은행에서 인터넷뱅킹 사용을 장려하는 이유가 있다.  

 

실로 엄청난 업무 처리 속도이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은행에 비치된 모든 홍보물을 다 읽었다. 내 앞에는 고작 2명의 고객이 있었을 뿐이다. 

 

 

[필리핀 마닐라] BDO은행에서 종이 통장을 만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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