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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파티의 핵심은

by 필인러브 201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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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이름이 아자야?"

아자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기초 체력이 가장 우수한 사람이었다. 깡마른 체구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 새벽 5시에 일어나 호핑투어를 해도 자정이 다 될 때까지 호텔 수영장을 떠날 줄 몰라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끊임없이 잔병치레를 하면서 조금만 많이 움직여도 이틀은 쉬어야 회복되는 나로서는 아자의 그 체력이 무서울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젠가 아자와 비콜 여행을 가야지 마음먹고 있는 것은 아자의 고향이 비콜 지방(Bicol Region)이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연한 연두색에서부터 진한 초록색까지, 녹색의 색감이 가득한 비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아자가 고향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중에는 직장에 다닌다고 도시 생활을 해도 주말만 되면 고향 집에 가려고 부산스러운 사람들이 필리핀 사람들이지만, 아자는 주말이 되어도 마닐라를 떠나지 않았다. 450km 넘게 떨어진 고향 집까지 한번 가려면 못해도 열서너 시간은 차를 타야 하는데 이동 시간도 시간이지만 왕복 2천 페소 가까이 드는 버스비가 부담이었다. 나로서는 비콜에서 마닐라까지 취직자리를 찾아오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자는 야무진 성격인 데다가 호기심도 많았다. 아테네오 대학의 졸업식을 마치고 마닐라에 가볼 욕심이 났는데, 때마침 인터넷 취업 사이트에서 마카티에 있는 여행사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모집 공고를 보아서 재빨리 이력서를 보냈다고 했다. 


다행히 여행사에서는 아자의 이력서를 받아들였다. 취직했다는 통보를 받고 재빨리 꾸린 짐가방에는 옷과 신발만이 가득했지만,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에게 세상은 밝고 멋지게 보였다. 하지만 마닐라에 사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코넛 하나를 사서 먹으려고 해도 그 가격이 달랐으니, 고향에서보다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생활이 넉넉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쿠바오 쪽에 친척 집이 있지만, 마카티에 있는 회사까지 매일 출퇴근하기는 너무 힘들어서 직장 근처에 보딩 하우스 하숙집을 구했는데, 작은 침대 하나 빌리는 것이 어찌나 비싼지 입이 쩍 벌려야만 했다고 했다. 물가 싼 고향 생각이 간절했지만, 고향 집에서 출퇴근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여행사 일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사무실의 좁은 책상 앞에 앉아서 자신의 한 달 월급보다 비싼 여행상품을 팔아야 하는 것은 답답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행사 직원이라서 출장을 핑계로 여행을 갈 기회가 종종 생기니 그것만큼은 매우 행복했다. 그런데 아자의 원래 이름은 정말 길기도 했다. 이름이 20글자가 훌쩍 넘어가니, 사원증에 풀네임을 적지 못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너무도 길어서 아무리 들어도 기억하지 못할 지경으로 되어 버린 것에는 아무런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아버지가 미들 네임에 할아버지 이름인 맥과 할머니의 이름인 카잔드라라는 이름을 모두 넣었기 때문이라니, 순전히 아버지 취향인 셈이다. 어릴 적부터 네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던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 닉네임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아자였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아자라는 이름은 한국 드라마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이름 앞글자에서 스펠링을 따다가 붙여 만든 닉네임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나. 아직 교복을 입고 다니던 학생일 때 한국 드라마를 보았는데 그때 주인공이 "아자!"라고 외치는 말이 듣기가 좋아서 자신의 이름을 아자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름만큼이나 내게 매우 신기했던 것은 아자의 젓가락질이 매우 능숙했다는 점이었다. 멀고 먼 곳까지 5일간이나 여행을 다녀와 놓고 피곤한 기색도 별로 없다가 삼겹살에 김치찌개를 먹자는 이야기에 마냥 활짝 웃는 것까지야 워낙 체력이 좋은 아자이니 그려러니 했지만, 어지간한 한국인보다도 더 젓가락질을 잘하다니 대체 어디에서 젓가락 사용법을 익혔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 왈, 그냥 배우고 싶어서 콩을 한 줌 가져다가 집에서 혼자 3일 정도 연습했다나. 말은 심드렁하게 했지만 아마도 아자는 3일 내내 매우 열심히 젓가락질을 했을 터였다. 때로는 짜증을 내며, 때로는 성공에 기뻐하며, 때로는 이를 꽉 악물며.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익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작은 눈망울을 가득 접으면서 활짝 웃고야 말았을 것이다. 필리핀 동서남북으로 함께 다닌 여행지가 몇 곳인데, 보지 않아도 그런 건 뻔했다.






비콜 처녀인 아자가 다니는 회사에서 연말이라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고 했다. 나는 화려한 파티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필리핀 직장인들의 연말파티 구경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두 심심한 유니폼을 벗어버리고 화려한 파티용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참석한다고 하니 구경을 하러 가지 않을 수 없다. 성격 괄괄한 아자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회사는 마카티에 있는 '락소트래블(Rakso Travel)'이란 이름의 여행사인데 회장이 한국인이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필리핀 사람을 대상으로 한국이니 호주 등으로 가는 해외여행 상품을 주로 취급하고 있으니 직원의 대부분은 필리핀 사람이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직원이 200명이 넘으면 연말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것 정도야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런데 올해에는 회사 창립 20주년이라서 그 어떤 해보다 크리스마스 파티 규모가 클 것 같다고 했다. 페어몬트 호텔의 연회장까지 빌려서 파티를 하는데, 수백 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썼다는 소문이 있다나. 하지만 필리핀 직원 입장에서 보면 크리스마스 파티의 핵심은 회사 창립 20주년이나 호텔에서의 식사가 아니었다. 춤추고 노래하기를 그 무엇보다 좋아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연말 파티의 핵심은 댄스가 된다. 200여 명의 직원이 모두 춤을 출 수는 없으니 부서마다 참여자를 뽑은 뒤 세 그룹으로 나누어 댄스대회를 하는데 우승 상금이 몇만 페소나 된다고 했다. 마카티에 있는 고급 호텔에서 파티를 하는 데다가 라플 추첨 상품도 빵빵하다고 하니 드레스를 잘 차려입고 갈 마음으로 직원들 전부가 마음이 들떠 파티만을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근무하는 일은 야근 수당을 받아도 답답한 일이지만, 댄스 대회를 위한 춤 연습을 한다면 다들 굉장히 부지런해져서 퇴근 후까지 집에 가지 않고 춤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댄스 전문 강사까지 불러서 춤 연습을 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 공연 모습은 기대 그 이상이었다. 전문 댄서들도 아닌데 야광 옷까지 동원하여 춤을 추는 모습은 입이 쩍 벌어지게 했다. 한국인이라면 회사에서 하는 창립 파티를 위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모두 즐거운 모습이기도 했다. 하긴, 파티 끝자락에 있었던 라플 행사는 내가 봐도 흥겨울 만했다. 라플 상품으로 한국 여행 상품과 3만 페소나 되는 상금이 등장한 것이다. 운이 좋으면 한 달 월급 이상의 돈이 그냥 생기는 것이니 다들 흥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아자를 만나 들은 뒷이야기는 좀 슬펐다. 호텔에서 놀이공원 퍼레이드에서나 봄 직한 직원을 본 기억이 나서 그런 파티용 드레스를 빌려 치장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물었더니, 적어도 6천 페소는 들었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자신은 파티복 대여하는 곳에서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빌렸지만 그래도 650페소나 주었다는 것이다. 메이크업에도 800페소나 들었다고 하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6천 페소는 썼으리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아자 주장에 따르면 그 직원이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치장한 것이 작년까지만 해도 베스트 드레서를 선정했기 때문일 것이라나. 그런데 올해는 다른 상품이 워낙 많아서 베스트 드레서를 뽑지 않았다니 이걸 어찌할꼬. 1,500페소나 주고 파티용 드레스를 빌려 입은 미라가 드레스를 반납하기 전에 사진을 수백 장 찍은 것까지야 흥겨운 농담이었지만, 킷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자신의 팀은 댄스대회에 입을 옷이며 장비를 준비한다고 700페소나 되는 참가비를 걷었는데, 2등의 영광을 얻기는 했지만 팀원끼리 상금을 나누었더니 고작 300페소밖에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1등을 했어야 본전이었는데 2등을 해서 400페소나 써야 했다는 킷트의 이야기에 아자가 깔깔 웃으며 자신의 팀처럼 퍼포먼스를 했었어야 한다고 말참견을 했다. 많은 돈을 걷지 않고도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1등 한 팀의 팀원다운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페어몬트 호텔(Hotel Fairmont Makati)





▲ 방명록에서 이름 확인을 하면 테이블 번호를 알려준다.  




▲ 굳이 일정표를 보지 않아도 짐작되는 식순으로 파티가 진행된다.  높은 분들의 축사 뒤에 직원들의 댄스대회가 열리는 식이다. 중간에 몰래 집에 가는 사람이 없도록 중간중간 라플 추첨도 한다. 




▲ 필리핀 국가가 흘러나왔고, 나는 자료 화면 속 장소에 내가 모두 가보았음을 깨닫고 뿌듯했다.  




▲ 주책스러운 성격의 쉴라가 이렇게 진지한 태도로 "왜 락소 트래블에서 일하는가"란 주제에 관해 긴 이야기를 하다니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 모두가 듣는 척 하지만 실상 듣지는 않는 축사 





▲ 필리핀 사람들의 파티에 사진이 빠질 수 없다. 심지어 음향 담당 아저씨도 사진을 찍는다. 



▲ 회장님 사진을 찍는 사장님  



▲ 직원들의 댄스 대회 사진을 찍는 회장님 





▲ 뭔가 시상식을 잔뜩 했다. 




▲ 수상자 중에서 가장 큰 환호를 받은 분은 바로 이분이었다. 락소트래블에서 20년이나 일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분이 서류 배달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더 놀라웠다.  보통 그런 직종은 회사 이직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 쉴라의 화장은 어떤 캐릭터를 컨셉으로 한 것이라는데, 설명을 들어도 대체 무슨 캐릭터인지 모르겠다. 




▲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사람 중 그 누구도 경품 추첨의 행운을 갖지 못했다. 텔레비젼 등 가전제춤도 경품으로 많이 나왔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 댄스의 시간 






▲ 망토를 두르고 노래를 한 남자가 한국여행의 행운을 거머 쥐었다. 





시상식이 갑자기 클럽 분위기로 바뀌게 된 것은 라플 상품으로 3만 페소의 상금이 나왔기 때문이다. 회장님이 축사를 하실 때는 모두 딴생각을 하고 있었겠지만, 이때만큼은 초집중하여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회장님의 손만 바라보았다.




▲ 이런 멋진 파티용 드레스는 대부분 빌려서 입는다. 대여료가 아깝지 않게끔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 두어야 한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대체 왜 이렇게나 많은 사진을 찍는 것인지 모르겠다. 얼마나 사진을 많이 찍는지 보기만 해도 지친다.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파티의 핵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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