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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자유여행] 스카프와 노브랜드 김말이와 버스 컨덕터

by 필인러브 2019.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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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패션 아이템이라면 스카프부터 떠오른다.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긴 스카프는 참으로 요긴하여서 멋을 내기 위한 용도 이상으로 쓰인다. 먼지가 많을 때는 먼지 가리개로 쓰이고, 에어컨이 차가울 때는 담요처럼 쓰이며, 햇살이 뜨거울 때 해 가리개로 쓰이니 그야말로 생활 필수 아이템이다. 그런데 그렇게 다용도로 쓰이는 스카프도 사용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그 활용도가 달라진다. 주변의 필리핀 사람들은 으레 하나씩 다 가지고 있으니 나도 가지고 싶어 스카프를 하나 장만해두었지만, 내게는 딱히 유용하게 쓰이지 않았다. 마카티 그린벨트 쇼핑몰을 죄다 돌아다니면서 까다롭게 고른 것을 생각해보면 매일 써야 마땅하지만, 실상 그렇지 못했다. 남들은 생활 속에서 두루두루 잘만 쓰는데, 내게는 그저 귀찮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러니까 1월의 하늘색에 연한 살굿빛 홍학이 그려져 있는 내 멋진 스카프가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오래간만에 스카프를 찾아 꺼내든 것은 식중독 때문이었다. 식중독에 심하게 걸려 일주일째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칩거하고 있었다. 무언가 글을 써달라고 원고 의뢰를 받아 두어서 마음은 바빴지만, 도무지 내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답답하여 올티가스에 새로 생겼다는 노브랜드(No Brand) 매장이나 잠깐 구경을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외출 준비가 쉽지 않았다. 전염병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혐오감이 들 정도로 두드러기가 심했으니 긴 바지에 긴 소매 옷을 입었는데 목 주변이 문제였다. 목 주변에 난 두드러기를 가리기 위해서는 스카프라도 둘러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사람 많은 지상철 안에서 스카프는 형벌같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답답한 MRT 지상철 안에서 땀을 쏟아지는데 두드러기 난 곳이 따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다른 사람이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보든 말든 온몸을 두른 천이란 천은 모두 벗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아이 하나 더 타지 못하게 사람으로 가득한 MRT 지상철 안에서는 팔을 살짝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올티가스까지 몇 정거장만 더 가면 되지만 그 잠깐을 참지 못하여 과달루페역에 내리기로 했다. 마닐라의 지상철은 배차 간격이 띄엄띄엄해서 과달루페역에서 한참이나 지상철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스카프를 벗어버린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이날 내가 겪어야만 했던 문제는 스카프의 갑갑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원인은 김말이였다. 로빈슨 갤러리아(Robinsons Galleria) 쇼핑몰에 있다는 노브랜드(No Brand) 매장에서 김말이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꽤 즐거웠지만, 매장 구경을 너무 오래 했나 보다. 쇼핑몰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고, 금요일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월급날인 데다가 다음날 공휴일까지 겹치니 그야말로 난리였다. EDSA 도로의 교통체증이 어찌나 심한지 집에 가는 것이 무서울 정도이다. 소위 말하는 bumper-to-bumper traffic 이 예상되는 터라 MRT 지상철을  타고 싶었지만 소중한 김말이가 다칠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사람으로 가득 찬 지상철 안에서 납작하게 되어 버릴 터였다. 결국, 차가 막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버스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김말이가 든 봉투를 손에 꼭 쥐고,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버스 컨덕터(bus conductor) 일을 하는 꾸야(젊은 남자를 지칭)가 이날 내 은인이 될 줄이야. 버스 뒤쪽에 빈자리가 나자 재빨리 나를 불러 앉게 해줄 때부터 참 고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버스에서 내릴 때도 큰 도움을 받았으니 귀인이 아닐 수 없다. 만원 버스 안에서 자리를 차지했을 때는 분명 즐거웠는데, 이 자리가 버스에서 내릴 때가 되자 괴로움이 되었다. 좌석 사이 통로까지 사람으로 가득하여서 도무지 운전석 옆에 있는 문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내 전투력을 보았을 때 자력으로 버스에 내라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돈을 열심히 세던 꾸야가 내가 인파를 헤치고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도와주러 온 것이다. 뭐라 뭐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내주도록 종용해주니 이보다 고마울 수가 없다. 문 옆 근처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움직이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으니, 내 가방을 선뜻 받아다가 들어서 옮겨주기까지 한다. 어찌나 고마운지 살라맛 뽀(타갈로어로 고맙습니다는 뜻)란 뻔한 이야기로는 부족해 보일 지경이다. 하도 고마워서 버스에 내리면서 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모두 꺼내 팁으로 건넸다. 그런데 이 꾸야, 점잖게 내 팁을 사양하더니 웃는다. 나는 억지로 팁을 손에 쥐여주고 콜라라도 사서 먹으라고 일렀다. 17페소짜리 버스를 타면서 팁을 70페소나 주는 일은 드문 일이지만, 이 꾸야의 도움 아니었으면 버스를 타고 비쿠탄을 지나 알라방까지 갔었을 터였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 알라방 어딘가에서 눅눅해진 냉동 김말이를 손에 쥐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금요일 밤에 김말이를 사는 일 따위는 앞으로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버스 컨덕터(bus conductor) : 버스에 탄 승객들에게 돈을 받는 일을 하는 사람. 한국에서 1960년대 볼 수 있었다는 버스안내양과 비슷한 일을 하는데, 필리핀에서는 보통 남자가 많이 한다. 보통 고졸이상 학력으로 뽑는데,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는 능력'이 버스 차장의 필수 능력으로 꼽힌다. 버스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간단한 산수능력 시험을 보기도 한다.  



▲ 필리핀 마닐라. 



▲ 마갈라네스 역(MRT Magallanes station) 



▲ 이 기계를 통해 교통카드를 충전해서 쓸 수 있다. 



▲ 과달루페 역(MRT Guadalupe station)



▲ 멀리 화재가 난 것이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 불은 올티가스에 도착해서까지 보였다. 



▲ MRT 지상철의 가장 앞칸은 노약자만 이용할 수 있다. 




▲ 올티가스 역(MRT Ortigas Station)




▲ MRT(Manila Metro Rail Transit System Line 3) 지상철은 시설이 매우 열악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좋아졌다. 역 안내도도 있다.  




▲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서 한가한 편이다. 



▲ 직진하면 로빈슨 갤러리아(Robinsons Galleria) 쇼핑몰에 갈 수 있다. 



▲ 금요일 퇴근 시간, 시내버스 안 



▲ 버스 요금을 내면 이런 영수증을 준다. 




[필리핀 마닐라 자유여행] 스카프와 노브랜드 김말이와 버스 컨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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