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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생활] 도넛과 바꿔 먹는 닭고기 티놀라(Tinola)

by 필인러브 2020.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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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시우(Paksiw)



후덥지근한 저녁이었지만, 내 체온은 36도였다. 체온계를 받아들고 가드 아저씨 체온을 재면서 체온계가 고장이 나지 않았음에 안심했다. 가드 아저씨들이야 위에서 시키는 것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34의 숫자가 찍히는 체온계를 내 이마에 가져다 대고 있는 것을 보면 대체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이런 형식적인 절차가 방역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어쨌든, 지금은 정상적인 체온계를 손에 들었고, 모두 정상 체온이 나왔으니 오늘 저녁 아저씨들의 저녁 식사메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로 했다.


요즘 내 주요 관심사는 두 가지. 배달 음식과 가드 아저씨들의 저녁 식사 메뉴이다. 코로나19 덕분에 가드 아저씨들이 직접 밥을 해서 먹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제법 요리 솜씨가 그럴싸했다. 비용 때문인지 반찬은 단 한 가지였지만, 방우스 생선을 끓인 뒤 식초로 맛을 내는 '팍시우(Paksiw)'에서부터 돼지고기에 감자니 양파 등을 넣고 만드는 '닐라가 바부이(Nilaga Baboy)'까지 메뉴는 다양했다. 가드 아저씨들과 방우스 생선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인지에 대해 세상 진지한 모습으로 토론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외출이 아닌 타인과의 교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깥출입 자체가 그립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는 일, 그 자체가 더 그리운 것이다. 표정을 살필 수 없게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바이러스가 걸린 사람은 아닐까 의심하면서 사람을 보고 뒷걸음질 치는 것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행해지고 있는 즐거운 나의 격리 생활이 70일을 넘기고 있었다. 어린아이였을 때면 모를까,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는 지금까지 이렇게 같은 장소에만 머물기는 처음이다. 그런데 매우 의외이지만, 시간의 속도감은 평소보다 더 빨랐다. 어찌 된 영문인지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처럼 여겨지기만 했으니, 삶의 한 조각을 이렇게 휙 보내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시시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5권에 이르는 소설책을 다 읽느냐고 주말을 온통 보내고는 주말이 왜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중얼대어 보았지만, 주말 따위는 의미를 잃은 지 오래임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순간순간 불쑥 치솟는 내 우울감이 코로나 블루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래도 유쾌한 감정이 들기는 어려웠다. 나를 좀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앞으로 올 두 달 역시 지난 두 달처럼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 내게 요즘 생긴 새로운 취미는 간식 배달이다. 날씨가 좀 덜 덥고 기운이 샘솟을 때면 샌드위치며 도넛 등을 만들어서 가드 아저씨들에게 배달하는 것인데 꽤 즐겁다.


"저기, 그거 파는 거예요?"

가드 아저씨들에게 도넛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여자분이 나를 보더니 도넛을 파느냐고 물어왔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은 반밖에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에 하나 먹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내가 도넛을 팔고 다닐 리가 없다. 그저 간식으로 나눠 먹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하나 줄까 물어보았더니 여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연신 "아임 샤이"를 외치기에 "나는 부끄럽지 않아서 괜찮아."라고 대꾸해주고 집으로 달려가 남아 있는 도넛 한 개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생수 배달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릴 리 없어 재빨리 바깥으로 나가보니 그녀가 서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 유지에 힘쓰면서 그녀가 내게 내민 것은 티놀라(Tinola)라는 이름의 닭고기 수프였다. 그녀는 도넛의 답례라는 이야기와 함께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닭고기를 내게 쥐여주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멀찍이 떨어져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온 김에 나와 이야기를 좀 나누어도 좋을 터인데 왜 이렇게 빨리 사라졌을까 하는 의문은 며칠 뒤 풀렸다. 도넛을 만든 김에 가져다주려고 그녀 집 앞에 섰는데 어쩐지 마음이 부끄러웠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처지에 이렇게 와도 괜찮은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노크를 하기까지 꽤 망설여야 했다. 고작 도넛 몇 개 주려니 손이 부끄럽다고 할까. 잠깐 머뭇대다가 도넛을 건네고, '쎼쎼'라고 말하기에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알려주고, 닭고기 수프가 참 맛있었다고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뭐라 뭐라 이야기하면서 기쁘게 웃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부끄러움과 즐거움이 비슷한 밀도로 마음속을 채웠다. 




 티놀라(Tinola). 감기 걸렸을 때 먹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진한 생강 향이 느껴졌다. 이 음식은 닭고기를 주재료로 양파와 생강 등을 넣어 만드는데, 요리 마지막에 마룽가이(Malunggay) 잎을 잔뜩 넣어 완성한다. 



 이웃집 언니가 닭고기를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닭똥집으로 만든 아도보(Adobo)도 얻어 먹었다. 




 방우스 밀크 피쉬 



 가드 아저씨들 준다고 샌드위치를 16개나 만들고 나서, 완전히 지쳐버렸다. 앞으로 비 오는 날은 샌드위치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나의 멋진 친구, 왕완딩 씨의 식료품 배달 서비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오징어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시장에 가서 한가득 사다 주었다. 배달 서비스에 대한 답례로 김밥을 만들고, 드디어 맛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필리핀 마닐라 생활] 도넛과 바꿔 먹는 닭고기 티놀라(Tin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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