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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제너널 루나와 마닐라 비논도 산니콜라스 거리의 집

by 필인러브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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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Luna Birthplace

 

 

1565년의 일이다. 에스파냐(영어식 국명은 스페인)의 왕이었던 펠리페 2세로부터 필리핀 원정대 대장으로 임명받은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1502년~1572년)는 긴 항해 끝에 필리핀에 도착했다. 순식간에 보홀섬까지 가서 보홀을 지배하던 시카투나와 혈명을 맺은 레가스피는 세부에 산 페드로 요새를 짓고 향료를 찾았지만, 세부 지역에는 향료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중국의 상인들이 온다는 마닐라로 눈길을 돌렸고, 마닐라로 부하들을 보냈다. 1571년 레가스피의 부하들이 마닐라 일대마저 장악하는 것에 성공하자 레가스피는 마닐라로 올라와 총독부를 설치하고, 인트라무로스를 건설하면서 본격적으로 필리핀을 식민지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스페인의 통치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면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났다고 하여 필리핀이 독립국이 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필리핀은 스페인과 미국에 걸쳐 375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백만 명이 넘는 필리핀인들이 독립을 외치다 죽은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1902년)이다. 


1899년 필리핀-미국 전쟁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본격적으로 받기 전에 있었던 필리핀-미국 전쟁(Philippine–American War)에 참전했던 군인 중 안토니오 루나(Antonio Luna, 1866년 10월 29일~1899년 6월 6일)라는 이름의 인물이 있다. 1866년 마닐라 비논도에 있는 산니콜라스 거리의 집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루나는 인문학과 문학, 화학 등을 공부한 인재였다.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그림만큼이나 의처증으로 부인과 장모를 살해한 것으로 유명한 필리핀의 국민 화가, 후안 루나 노비시오(Juan Luna Novicio)가 바로 안토니오 루나의 형인데, 그는 후안 루나의 초청으로 스페인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고 말라리아 전염병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1898년의 상황은 그를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스페인 시대의 많은 엘리트 계층이 그러했듯, 안토니오 루나 역시 원래 비폭력적인 방식의 점진적 개혁을 지지했었으나 1896년 호세 리잘이 처형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펜을 놓고 총을 손에 쥔 안토니오 루나는 필리핀 혁명군 총사령관(Commanding General)이란 새로운 일마저 매우 유능하게 해냈다. 하지만 일찍이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하던 시절부터 전쟁은 결국 보급 싸움이었으니, 그 어떤 누가 이끌었다고 해도 필리핀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딱 맞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루나 장군은 펼친 게릴라 전술과 군사훈련은 상당히 훌륭했다고 평가받는다. 미군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당시 그가 지휘했던 루손섬 북부 전선을 '루나 방어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안토니오 루나(1866년~1899년)  

군의 기강 확립과 규율을 중시했던 안토니오 루나는 군 개혁을 강경하게 외쳤다. 하지만 모든 이가 인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안토니오 루나는 결국 미군이 아닌 같은 필리핀인인 정적의 손에 암살당하면서 32세의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흥미로운 것은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의 배후로 지목된다는 점이다. 1899년 당시 필리핀은 실질적인 독립을 하지 못했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불라칸에 세웠던 혁명정부의 지도자로서 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안토니오 루나의 사망과 관련하여 자신의 지시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지만, 루나 장군이 아기날도가 서명한 명령서를 받고 누에바 에시하로 갔다가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Antonio Luna Birthplace

제너널 루나

각설하고, 역사 속 많은 인물이 그러하듯, 안토니오 루나도 사망 후 더욱더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안토니오 루나가 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일했던 기간은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필리핀에서는 안토니오 루나를 추모하기 위하여 필리핀 곳곳에 여러 기념비를 세웠다. 지명마저 많이 바꾸었는데, 덕분에 필리핀 여행을 하다 보면 곳곳에서 안토니오 장군의 이름을 딴 지명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마닐라의 리잘파크에서 파코 공원으로 연결되는 거리의 이름은 제너널 루나 스트리트(Gen. Luna St)이다. 세계적인 서핑 명소로 유명한 시아르가오(Siargao Island)의 클라우드 나인 주변의 동네 이름도 제너널 루나(General Luna)이다. 제너럴 루나의 이름을 가진 곳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마닐라의 UP대학교 안에 있는 제너널 루나 운동장(Gen. Antonio Luna Parade Grounds). 필리핀의 대학 대부분은 치안을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지만, UP대학에서는 일반인에게도 운동장 및 조경 시설을 개방하고 있어 바람이 선선한 계절이 되면 조깅하러 방문하기에 적당하다. 루나 장군이 불라칸에 설립했던 육군사관학교(Philippine Military Academy)도 그 자리를 바기오로 옮겼을 뿐 여전히 수많은 졸업생을 군사 지도자로 내보내고 있다. 그리고 보니 몇 년 전에 현대중공업이 필리핀 해군에서 수주한 호위함 역시 안토니오 루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서 태어난 곳까지 잘 관리되는 것은 아니다. 안토니오 루나의 생가라는 마닐라 산니콜라스 거리의 집은 갈 곳 없는 노숙자와 떠돌이 개의 차지가 되었다. 먼지와 쓰레기만 가득하여 그야말로 황량한 모습이다. 그런 와중에 국기만 새것으로 걸려 역사적 명소임을 알려주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마닐라 비논도 산니콜라스, Antonio Luna Birthplace
Antonio Luna Birthplace Historical Marker
Antonio Luna Birthplace
Antonio Luna Birthplace
필리핀 국립미술관(Philippine National Museum of Fine Arts)
필리핀 국립미술관 입구에 전시된 후안 루나의 작품. 후안 루나의 동생이 안토니오 루나이다.

 

필리핀 역사: 제너널 루나와 마닐라 비논도 산니콜라스 거리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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