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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피나투보 타루칸마을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마리아 아주머니와 왈라 바왈 라플

by 필인러브 2019.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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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스러운 타루칸 마을 꼬마 녀석들은 내가 상자를 들고 "라인" 이라고 외치면 재빨리 학교 교문 앞에 가서 줄을 서는 일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아이들 입에 달콤한 초콜릿 과자를 넣어주고 싶어 "라인!"을 외치느냐고 바쁜데 수바릿 아저씨가 내게 와서는 종이봉투를 보여주면서 제법 심각한 얼굴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마을에 올 때마다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는 아저씨라서 초콜릿 과자 나눠주는 일을 로사 아빠에게 맡겨놓고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수바릿 아저씨 이야기가 재미있다. 자신이 봉투 가득 카모테(고구마 비슷한 구황작물)를 가져다줄 터이니 가방을 바꾸면 안 되겠냐는 것이다. 카모테의 상태가 매우 좋다는 아저씨의 이야기는 내게 별로 솔깃하지 않았지만, 아저씨 얼굴에는 가방을 꼭 가지고 싶다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원래 라플 상품으로 나눠줄 예정이었지만, 아저씨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보잘것없는 규칙을 앞세우느냐고 안된다고 거절하면 집에 돌아가서까지 내내 마음이 찜찜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카모테와 가방 교환 협상에 응하겠다고 답을 해주기로 했다. 내 오케이 사인을 받은 아저씨는 매우 흡족한 얼굴을 하더니 봉투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 뒤 다시 등장한 수바릿 아저씨의 손에는 봉투가 넘칠 정도로 카모테가 가득 담겨 있었다. 타루칸 마을에서 생산되는 보통의 카모테와 다르게 알이 굵고 실했다. 아저씨가 내게 카모테를 보여주면서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을 때, 매우 좋다고 답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카모테는 품질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내 대답의 강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저씨는 손톱을 이용해서 카모테 귀퉁이를 파내어 안의 흰 속살까지 보여주면서 정말 좋은 카모테라고 거듭 강조를 했다. 이렇게 탐스러운 좋은 품질의 카모테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자신하는 듯했다. 나는 카모테를 매우 좋아한다고 호들갑스럽게 답을 해주고, 아저씨의 풀네임이 '수바릿 구티에레즈' 임을 확인하고 라플 종이에 아저씨 이름을 적어 가방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라플 종이를 바라보는 아저씨 얼굴이 다섯 살 아이처럼 해맑았다.


설탕이든 라면이든 무엇을 사도 꼭 80개씩 사는 것은 타루칸 마을에 가족 수가 대략 80가구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그런지는 매우 의문이었지만, 타루칸 마을의 가족 수는 거의 매달 1~2개씩 숫자가 바뀌곤 했다. 왜 어떨 때는 78가구이고 어떨 때는 77가구인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가구 수가 바뀜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80개를 사면 간단히 해결되는 일이었다. 물건이 남으면 함께 간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주어도 되니, 넉넉히 가지고 가면 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탐내는 물건이 조금 생겼을 때는 난처해지곤 했다. 모두에게 하나씩 공평하게 나눠주면 좋겠지만, 옷이나 신발, 주방기구와 같은 물건이 똑같은 것으로 80개나 생길 리가 없었다. 물건의 개수는 한정적이고 달라고 하는 이는 많으니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고민을 하곤 했다. 이 문제로 몇 달을 고심하다가 도입한 해결책이 라플(추첨)이었다. 하지만 말이 제비뽑기이지, 나의 상품 추첨은 마을 사람들 목록을 가지고 한명씩 나눠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언제 당첨되고 어떤 물건을 가지게 되느냐는 다르지만, 그래도 100% 당첨 이벤트인 셈이다. 그런데 수바릿 아저씨가 지지난달에 라플 제비뽑기에 당첨되어 나를 웃게 만든 적이 있었다. 라플 상품인 운동화 옆을 떠나지 못하고 있기에 제비뽑기에 뽑힌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더니,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종이에 적힌 이름이 바로 자신의 이름이라고 알려주신다. 누군가 신던 운동화는 이미 조금 낡아 있었지만, 색깔이 산뜻했다. 신발을 받아들고 자리를 떠나는 수바릿 아저씨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함이 가득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라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난달에 내게 와서 아주 시무룩한 얼굴로 하소연하기를 이번에는 아저씨 이름이 당첨자 명단에 없다나. 아무튼, 아저씨는 지난달의 경험으로 라플이 한 번만 당첨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가방은 매우 가지고 싶었으니, 자신이 가진 카모테를 가지고 나와 협상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물건에 욕심을 내는 경우는 가끔 보았지만, 아저씨처럼 무언가를 줄 터이니 바꾸자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나로서는 아저씨의 제안이 매우 신기했다. 얼마나 가지고 싶었으면 그런 생각까지 떠올렸을까 싶기도 하고, 전쟁통에도 살 사람은 다 산다는 그런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는 수바릿 아저씨가 가방을 가지고 가는 편이 좋기도 했다. 아저씨가 무척이나 탐을 낸 가방이 퍽 오랫동안 나와 함께 하였던 가방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아지도 아니고 가방에 무슨 이름을 붙여주겠느냐만, 나는 이 가방에 초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필리핀 곳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하지만 최근 가방을 새로 장만한 나는 초록이를 타루칸 마을에 기부하기로 했다. 큰맘 먹고 비싼 돈을 주고 샀던 가방이라 그런지 아직 상태가 말짱해서 집에 그냥 두기는 좀 아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수바릿 아저씨가 내가 아끼던 가방을 가지고 가서 잘 써준다면 그처럼 고마운 일이 없다.


▲ 물건을 받은 뒤에야 미소를 지은 마리아 아주머니



라플(raffle)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나로서는 꽤 현명한 방식으로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건 어쩌면 내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느 때처럼 라플 당첨자 종이를 만들어 놓고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오더니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주머니 표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차마 말을 끊지 못하고 끝까지 듣고, 죄송하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실토를 했다. 다행히 옆에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딱하다는 듯이 이야기에 끼어들어 아주머니에게 내가 아주머니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라는 것을 일러주었다. 아주머니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했지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해야만 된다고 결심을 한 듯 천천히, 그리고 매우 또박또박 "왈라 바왈 라플"이라고 이야기를 해왔다. 그제야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깨달은 나는 재빨리 가방에서 라플 종이를 꺼내서 아주머니의 이름을 여쭈었다. 아주머니 말씀대로 66번 마리아 디아즈 씨는 아직 라플에 당첨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 라플 목록의 78개나 되는 이름 중 50여 개가 이미 끝난 상태였지만 당첨자라고 표시한 이름 중 아주머니 이름은 없었다. 그러니 모르긴 몰라도 이웃집은 다 당첨되는데 자신만 한 번도 당첨되지 않아 어지간히 속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특별히 멋진 물건은 아니라도 다들 한 번씩 색다른 물건이 생겼는데 자신의 이름만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아주머니 머릿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갔을까, 하지만 벌써 상품에 라플 당첨자 이름을 적어둔 상태라 갑자기 수정하기란 어려웠다. 겉옷이라도 입고 있으면 벗어주면 좋으련만, 이미 마을 입구 수돗가에서 벗어주고 난 터라 다음 달에는 꼭 당첨 시켜 드리겠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리아 아주머니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한창 물건을 나눠 주고 있는데 마을 바랑가이 캡틴 아저씨가 오더니, 라플 당첨자 중 한 가족이 지난달에 다른 마을로 이사를 했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사하였다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버리고, 종이를 새로 꺼내 마리아 디아즈라고 적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를 불러 이걸 가지고 가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보잘것없는 플라스틱 상자에는 대만 여행 때 호텔에서 집어온 어매니티와 약간의 식료품, 그리고 이런저런 소소한 것들만이 가득했지만 아주머니는 기쁘게 웃었다.





▲ 잠이 살짝 덜 깨서 마을로 갈 준비를 하는데 계란 사라는 소리가 들리기에 골목길로 뛰어나갔더니 계란 장수는 없고, 장판 파는 아저씨만 보였다. 분명 계란이라고 들었는데 장판이라니. 계란이 먹고 싶었나 보다. 



▲ 마을로 가는 길에 만난 청년들. 대뜸 소 위에 올라타더니 내게 무척이나 자랑을 했다. 소를 타고 가는 것이 부럽지, 이런 눈빛이었다. 



▲ 비가 와서 손님이 없는지, 피나투보 화산 가이드 일을 하는 동네 청년이 따라붙었다. 운전기사로 따라온 라울이 나와 함께 가면 설탕이라도 받는다고 꼬신 모양이었다. 늘 나와 마을로 함께 가주던 삐또이 아저씨는 농사를 지으러 잠깐 고향에 가셨다. 






▲ 빵을 먹어 보아요. 



▲ 사진 인화 서비스는 여전히 인기가 매우 좋다. 아이 엄마가 내게 달려와서 사진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어왔을 정도이다.  무척 기다렸던 모양이다. 




▲ 아저씨, 그건 참 좋은 협상이었어요. 지금까지 피나투보 화산에서 본 것 중 가장 실한 카모테이다.  






▲ 귀염뽀짝이란 말은 이 아이를 위한 말이 아닐까 싶다. 







▲ 아이들에게는 사진 찍는 것도 일종의 놀이라서, 하염없이 찍어 달라고 한다. 귀찮아서 자리를 피해도 또 따라붙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른다.













▲  사진 인화 용지는 다 떨어져 가는데, 다음 달에 인화해갈 사진이 잔뜩이다.  




▲  박스 테이프도 자신이 아이들에게 장난감이 되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아이따족 아이들은 구슬치기 명수이다. 하지만 실컷 자랑만 하고, 내게 비법 전수는 해주지 않는다. 차이나타운에 가면 구슬을 잔뜩 사다가 마을로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자랑하기로 했다. 



▲  비가 가득 내린 뒤라서 공기가 너무 산뜻했다. 하지만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화장실이다. 



▲  산타 줄리아나 마을로 돌아가는 길 



▲  내 얼굴을 아는지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가셨다. 



▲  화산재로 만들어진 이곳에도 이끼와 같은 초록이 퍼져나가니, 자연의 힘은 신비롭다는 상투적인 말이 저절로 나온다. 



▲  굿모닝!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굿모닝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거친 땅 위를 맨발로 걸어가고 있기에 함께 차를 타고 가자고 청했더니 부끄러워하면서도 재빨리 차에 올라탄다. 없는 살림이지만 천이라도 뜯어서 아이 머리끈을 만들어 준 엄마 마음이 참 예뻤다. 



 차에서 내릴 때 보니 그래도 어른들이 신발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발을 신고 거친 땅을 걸으면 금세 못쓰게 될 터이니, 아이 엄마는 차에 내려서야 신발을 신었다.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마리아 아주머니와 왈라 바왈 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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